영국령 홍콩

 


'''홍콩
Hong Kong
'''
[image]
[image]
''''''
'''문장'''
[image]
'''1841년 ~ 1941년'''
'''1945년 ~ 1997년'''
'''성립 이전'''
'''반환 이후'''
'''청나라
홍콩'''
'''중화인민공화국
홍콩 특별행정구'''
'''언어별 명칭'''
영어: Hong Kong
광동어: 香港 (''Hēunggóng'')
중국어: 香港 (''Xiānggǎng'')
'''면적'''
1105.5 km²[1]
'''위치'''
[image] 홍콩
'''국가'''
God Save the King/Queen
'''수도'''
빅토리아 시티[2]
'''정치체제'''
대영제국의 식민지 [3]
'''군주'''
국왕[4]
'''주요 총독'''
존 보우링(1854~1859)
머레이 맥클레호스(1971~1982)
크리스 패튼(1992~1997)
'''언어'''
영어, 광동어
'''문자'''
라틴 문자, 한자
'''종교'''
기독교, 중국 토속 종교,
유교, 불교
'''민족'''
영국인, 광동인, 인도인
'''통화'''
홍콩 달러
1. 개요
2. 역사
2.1. 영국의 점령
2.2. 전후와 사회 변동
2.3. 반환
3. 군사
4. 의의
5. 참고 문서

[clearfix]

1. 개요


영국홍콩(British Hong Kong)은 1841년부터 1997년까지 156년동안 존속했던 영국의 식민지이다. 1997년 7월 1일영국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하면서 해체되었으며 그 후신이 현재의 중화인민공화국 소속 홍콩 특별행정구이다.
영어로는 이 시기를 '''영국의 홍콩'''(British Hong Kong)으로 칭하고, 중국어로는 이 시기를 '''영국 소속 홍콩'''이라는 의미에서 영속향항(英屬香港)[5]이라고 한다. 현재 홍콩특별행정구는 '''홍콩 차이나'''(Hong Kong China)라고도 칭한다.

2. 역사



2.1. 영국의 점령


영국청나라와의 교역을 계속 시도했으며 결국 영국 동인도 회사건륭제 이후 청나라 광동 성 광저우에 무역항을 설치한 후 무역을 해나갔지만, 영국의 무역적자가 심화되자 마약아편을 팔아서[6] 이득을 올리기 시작했다. 그래서 중국인들의 아편 중독이 심각해지자 1839년 청나라 조정의 승인으로 임칙서가 아편 수입을 금지했고, 영국은 여기에서 빌미를 잡아 중국을 공격, 제1차 아편전쟁이 발발해 1841년 광저우 남쪽의 작은 어촌이던 섬 지역인 홍콩 섬영국 해군에 의해 함락당했다. 당시 영국 해병대가 홍콩 섬 북단에 상륙, 이렇다 할 방어병력도 주민도 없던 무주지인 이 섬을 처음 점령한 후 빅토리아 시티(Victoria City)[7]라고 이름을 붙였는데 현재의 센트럴이 그 곳이다. 이후 1842년에 체결된 난징 조약에서 아편전쟁의 전리품으로 정식으로 영국에 양도된다. 그리고 그 다음 해인 1843년에는 영국은 빅토리아 시티를 건립할 겸 홍콩 총독부를 홍콩 섬 센트럴에 신설한다.
홍콩 총독부 시스템이 자리잡은 이후에 홍콩 총독은 영국으로부터 홍콩을 통치할 권리를 인정받은 홍콩 최고위 통치자로서 권력을 행사했고, 행정 부분은 비선출직 각료들과 경력직 관료들에 의해 집행되었다.
1860년에 체결된 베이징 조약으로 육지 부분인 구룡반도신계까지 전 지역이 영속적으로 영국에 귀속된다. 처음 베이징 조약에서는 구룡반도 남단과 스톤커터 섬이 할양되었는데 이 구룡반도 남단이 한국인 비중이 제일 높은 침사추이와 그 이웃 동네인 야우마테이, 몽콕, 홍함이었다. 더 나아가 영국의 육지부분 귀속은 지속되어 1898년에는 영국은 홍콩과 인접한 북부 섬과 신 행정구역으로 알려진 신계를 99년 간 조차받았다. 이때 신계는 초록택시가 운행하는 현 중국 국경 지대와 구룡반도 북쪽 신구룡을 포함하는 곳으로 이 곳과 구시가지의 경계가 바운더리 스트리트이다. 이후 신계 남부 카이탁에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을 세워서 사실상 이 지역의 조차 협약을 사문화하고 신계 북부 중국 국경지대만을 반환 대상으로 봐서 택시 색을 신구룡과 다른 초록색으로 지정하고 황무지로 남긴다.
19세기에 홍콩은 '''영국의 주요 무역항'''이 되었고 홍콩은 영국의 물산 집산지로서 활용되는 '''자유무역항''' 및 '''중국으로의 관문'''으로 선언되었다.[8] 이 때 구룡반도-광둥성 광저우 간 철도가 개통되었으며 또한 영국식 교육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1870년대~1880년대 이후 홍콩은 아시아의 영국령 중에서 가장 빅토리아 문화가 발달한 지역이 되었다.
그리고 영국의 지배를 받는다는 점에 있어 중국 국내 세력의 손길이 미치기 어려웠기 때문에 군벌이고 혁명당원들이고 궁지에 몰리면 홍콩으로 다들 망명하곤 했다. 쑨원만 해도 멸만흥한 운동을 할 때 청나라 팔기군의 추적 및 청조의 핍박을 피해 미국의 하와이와 영국 영토 홍콩에 와 있었다가 1911년 신해혁명으로 만주족의 청조를 멸망시키고 한족의 민주주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을 세운다. 이 과정에서 홍콩 역시 중국사의 소용돌이 속에 휩쓸려서 1922년 홍콩 선원 파업과 1925년의 5.30 운동 등 중국의 정치적 격변에 수차례 휩쓸리기도 했다. 또한 중국 내부의 혁명을 저지하기 위한 영국의 기지 역할도 하여서 영풍함 사건, 광저우 상단 사건 등의 사주에 개입되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이 터진 1941년 12월 8일에는 일본 제국이 홍콩을 영국군과의 전투 끝에 점령하고 군정을 시행했다. 이 때 중일전쟁에 대한 분풀이 등의 이유로 중국계 홍콩인에 대한 학살이 일어나기도 했다. 홍콩 경찰홍콩 소방처는 해산되고 그 자리는 일본군 헌병들이 차지했으며 일본 헌병들은 영국인에게만 허용되던 스타페리홍콩 트램 2층에 앉는 등 위세를 부리고 시민들을 위협하기 일쑤였다. 이 땐 영국계 홍콩인 백인들도 일본군의 눈치를 보고 다녔다. 일본군이 뿌린 낮은 가치의 군표는 홍콩 달러의 기능을 대체했는지라 홍콩의 경제 마비까지 초래했다. 그런 과정에서 중국인들은 중화민국군과 연계해 항일 게릴라를 조직해 저항하기도 했으며 영국군은 호주로 후퇴한 후 미군과 함께 동남아시아를 탈환하고자 여러 격전을 치르고 그 과정에서 차츰 미얀마, 방글라데시 등을 탈환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직 홍콩 전선은 탈환하지는 못했다. 미국도 필리핀을 겨우 탈환했기 때문에 미군에 비해 수적으로 밀리는 영국군은 별 수 없었다.
결국 1945년 8월 15일에 일본 제국이 패망하면서 영국은 홍콩을 수복했고, 특별군사법정을 열어 일본군에 부역한 중국인들과 홍콩에서 전쟁 범죄를 자행한 일본인들을 처벌했다. 이 때 중국인 5명이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22명이 투옥되었다. 일본인들은 21명에게 사형이, 85명에게 징역형이 선고되었다. 그 외에는 도주하거나 무죄방면되었으며 추가적인 기소는 없었다. 중국본토에서 중국 국민당중국 공산당 그리고 만주의 소련 NKVD에 의해 친일파와 전범 처단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진 것과 비교하면 조금 아쉬운 부분이다.

2.2. 전후와 사회 변동


한편 4대 강국으로 떠오른 중화민국은 홍콩 반환을 요구하면서 영국 정부를 압박했지만 영국은 강하게 거부했다. 사실 이때 미국이 홍콩을 중화민국 즉 중국 국민정부에 반환할려 했으나 영국의 결사반대로 결국 불발되었고 홍콩은 다시 영국령이 된다. 그러다가 중화민국은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에 패배했다.
1949년제2차 국공내전에서 중국 공산당중국 국민당대만으로 쫓아내고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하면서 중국 대륙이 공산화되자 중국본토에서 수많은 이민자들이 중국 공산당의 탄압을 피해 홍콩으로 도망쳐왔다. 이들 중에는 자본가들이 특히 많았다. 광동성푸젠성은행업을 하던 사람들과 고급 중국 요리를 만들던 요리사 등이 많았는지라 이것이 홍콩 금융업의 발전을 불렀으며 기존에 싸구려 포장마차인 차찬텡에서도 각 지역의 고급 중국 요리를 값싸고 푸짐하게 취급해 보급한다. 하이난 치킨라이스라 불리는 하이난성에서 먹는 치킨덮밥과 얌차라고 불리는 딤섬이 그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서양식의 스테이크도 소개되고 영국의 최대 식민지였던 인도에서 커리도 소개되어 각각 홍콩식으로 재해석되기 시작했다.
종전 후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홍콩은 의류와 주석 장난감을 만드는 제조업으로 유명해졌다. 이때 아직 홍콩은 선진 개발도상국으로 인건비가 저렴했다. 이러한 공장이 있던 곳은 주로 구룡반도의 홍함과 산포콩, 쿤통 일대로 특히 쿤통은 홍콩 카이탁 국제공항과 가까워서 공항과 연계해서 보세 의류공장이 많이 생겼다.[9] 이후로 1960년대에 들어서 대만과 한국이 의류업에서 강력한 경쟁자가 되자 전자산업에 손을 댔다. 주로 일본에서 부품을 사왔다가 홍콩에서 조립해서 수출하는 방식이었는데, 1960년대에 라디오가 세계적인 대중매체가 되면서 한때 홍콩은 세계 1위 라디오 수출 지역이라는 명성을 얻기도 했지만, 업체들의 규모가 영세해서 확장에 한계가 있었던데다가 대만과 한국에서 전자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하고 오일쇼크가 닥쳐오면서 사양길로 접어들게 되었고, 전자산업도 개혁개방 이후로 중국본토로 건너가게 된다.
한편 1960년대 홍콩은 분배가 잘 안 되어 빈부격차가 극심했다. 오늘날 홍콩 사회도 빈부격차가 큰 편이지만 당시에는 현재보다 더 계층 격차가 심각하고 하층 계급의 생활 수준이 이루 말할 수 없는 상태였다. 홍콩 섬롤스로이스가 택시 노릇을 하고, 고급 유럽식 사교클럽이 불야성을 이루며 말 그대로 '''돈이 썩어나는''', 아시아 최고로 부유한 곳인 반면 중일전쟁국공내전, 게다가 베트남 전쟁까지 겪으며 피난민들이 중국 대륙베트남에서 몰려든 구룡반도는 상대적으로 소외되어 생활 수준이 처참하게 어려웠었다. 더구나 홍콩 지하철이나 자동차 용 크로스하버 해저터널이 개통하기 이전에는 구룡반도홍콩 섬을 오가는 건너는 교통수단이 '''배'''뿐이었다. 그래서 구룡반도와 홍콩 섬의 교류가 극히 적어 다른 나라처럼 따로 국밥으로 놀았다. 여기에 홍콩 섬에 비해 상당히 낮은 구룡반도 주민들의 경제력이 더해져 몇몇 홍콩 섬 주민들은 아예 구룡반도 주민들을 홍콩인으로 취급하지도 않았고, 홍콩 섬에 사는 사람들은 구룡반도에 절대 발도 들이밀기 싫다는 식으로 구룡반도 주민들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이에 구룡반도 주민들의 불만이 쌓여갔다.
더불어 빈부격차는 물론이고 부정부패도 현재는 상상도 할 수 없이 심각했었다. 소위 차값을 주고 받는다는 은어로 통하던 뇌물은 기본이라서 뇌물을 안 주면 소방관들이 화재 진압도 하지 않거나[10] 병원에서는 의사에게 차값을 안 주면 죽든 말든 내버려 두거나, 취업에서 면접관에게 차값을 줘야 합격하는 식으로 부정부패가 만연했으며 돈 세탁도 기승을 부리는 등 여러모로 개판이었다. 당연히 이 때는 조세 피난처로도 아주 선호받았다.
이에 따라 하층민들의 권리 투쟁이 여럿 있었다. 1966년, 당시까지만 해도 홍콩 지하철도 없고 크로스하버 터널도 없어서 홍콩 섬-구룡반도 간 연락을 스타페리가 독점하던 시절, 페리 요금이 인상되자 이에 대항해 비폭력 시위가 일어났다. 홍콩 총독부가 이 항의시위를 탄압하자 어렵게 살던 구룡반도 주민들의 불만이 폭발하여 시위가 폭동으로 격화된다. 주로 조던 로드나 침사추이 등 구룡 일대에서 일어났으며 이때 홍콩 버스도 폭리를 취하다 표적이 되어버려 구룡반도의 버스회사인 KMB도 공격당했다. 중국인들이 벌이는 대대적 폭동에 홍콩 총독부는 당황해서 홍콩 경찰 소속 기마경찰들을 투입해 얼른 진압해 버린다. 이때만해도 기마경찰을 빼고 전문적인 폭동진압부대가 없어서 대게 순찰경관들이 나무로 만든 진압방패진압봉을 들고 진압하는 방식이었다. 이후 1969년 전문적인 폭동진압용 경찰기동대인 PTU대가 창설되고 1976년에는 PTU대 예하로 SDU소대 즉 대테러 경찰특공대대테러부대로 창설되었다.
또한 이 와중에 몇몇 홍콩인들은 홍콩의 사회 문제를 영국 식민지 체제의 폐단으로 보고 그 해결책을 중국 본토의 문화대혁명에서 찾고자 했다. 1960년대 중국본토에서 문화대혁명이 발생하자, 중국 공산당의 사주로 홍콩 공회연합회가 중심이 되어, 문혁에 호응하는 젊은 청년들과 빅토리아항 부두[11]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1967년67 구룡폭동이 발생했다. 영국 정부는 이 때 긴급조치법을 만들었고, 홍콩 당국은 이 폭동을 긴급조치법을 통해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에 중화인민공화국이 크게 반발하여 홍콩 홍위병들에 대한 배상과 사죄를 요구하자 홍콩 당국은 이를 가차없이 거절했고 흥분한 대륙 홍위병들이 주중 영국 대표부 점령 사건을 일으키기도 했다.
이러한 사건들은 영국령 홍콩 정부로 하여금 사회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도록 압력을 가했다. 이에 따라 1974년 염정공서가 세워지고 계좌 개설을 어렵게 해 놓는 한편 신설 염정공서가 검은 돈을 전부 적발해내 돈세탁을 더이상 할 수 없게 하였다. 조세피난처 노릇도 불가능해졌다. 그리고 1976년 크로스하버 터널 개통, 1979년 홍콩 지하철 쿤통선[12] 개통, 소방훈련학교 및 경찰훈련학교 설립, 부패 경찰관 전원 해고와 구속수사 및 신임 경찰관 대거 채용, 영국 본토의 반부패 전문가 초빙, 공중위생을 높이는 클린 홍콩 운동 등을 벌이며 말 그대로 홍콩의 질적 선진화가 이루어지게 되고 빈부격차도 많이 해소된다.[13]
1978년중화인민공화국이 경제 개혁안을 시작했을 때, 홍콩은 중국 본토에 투자되는 외국 자금의 주요 공급원이 되었다. 이듬해 경제 특구가 홍콩 바로 북쪽에 있는 선전에 건립되었고, 재정과 금융 분야에서 계속해서 영향력이 커지면서 홍콩의 산업은 제조업과 섬유에서 점진적으로 서비스 업종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이때를 기점으로 홍콩이 선진국에 진입하며 먹고 사는 문제도 해결되고 오늘날 우리가 아는 홍콩이 된다. 사실 홍콩도 꽤 격세지감이 커서 노인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상전벽해 식으로 모든게 바뀌었다.

2.3. 반환


1979년 북부 신계 지역의 조차가 1997년으로 끝남에 따라 25대 총독 머레이 맥클레호스 영국령 홍콩 총독이 후속 대책을 논의하기 위해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비공식 회담이 시작되었다. 처음 영국 측에서는 조차 기간의 연장을 정식으로 요청했지만 중국 측 대표인 덩샤오핑의 결사 반대로 무산되었고, 차차 홍콩 전역을 중국에 돌려주는 것으로 가닥이 잡혔다.
영국으로서는 홍콩을 계속 점유하고 싶어도 방법이 없었다. 홍콩 행정구역을 보면 정식으로 할양받아 영구 소유권을 확보한 홍콩 섬구룡반도는 이미 도심 지역으로서 개발이 끝났고, 이를 배후지로 뒷받침하는 지역이 바로 신계 지역이다. 이 상황에서 신계 지역의 조차 기간이 끝나고 중국에 반환하면 홍콩은 기존의 도심 지역만이 남게 된다. 이러면 홍콩의 자립은 불가능해진다. 이 상황에서 신계 조차의 연장이 무위로 끝나자 영국은 홍콩의 영구적인 점유는 더 이상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홍콩 전체를 반환하는 쪽으로 선회한 것. 한마디로 영국 정부도 버틸 만큼 버텼다는 얘기다. 중국과의 협상을 맡게 된 마거릿 대처 총리도 처음에는 홍콩 섬하고 구룡반도 그리고 신구룡만 남길 생각이었다. 그러나, 영국아르헨티나가 일으킨 포클랜드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해 결국 홍콩 전체를 반환키로 결정했다.
포클랜드 전쟁에서 중국아르헨티나를 지원하면 영국군아르헨티나군을 이길 수 있을 지 불투명했다. 포클랜드 전쟁에서 영국이 이기긴 했지만 주요 세력인 영국 해군의 손실도 엄청났고 현실적으로 중국과 척을 지면서 홍콩을 유지하기는 어렵다는 결론이 났다. 물론 미국이 있는지라 중국 따위가 군사력으로 홍콩을 수복하는 건 곧 미국과의 전쟁을 뜻했지만 문제는 핑퐁외교로 중국과 미국이 적대 관계를 청산했다는 것이다. 여기에 일본도 1972년 중국과 수교 후 대륙의 중화인민공화국을 인정하고 중국이 개혁개방을 선언, 서방과 적대관계 청산을 선언하자 굳이 중국을 적대시할 이유는 없었다.
결국 1982년 9월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베이징을 방문하면서 첫 번째 공식 회담이 시작되었다.
1984년까지의 긴 토론 끝에 결국 일국양제 원칙에 따라 영국홍콩 전역을 중국에 돌려주는 것으로 합의했고, 1984년 12월 19일 영국 측 대표인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와 중국 측 대표인 자오쯔양 중국 국무원 총리 사이에서 영중공동선언이 발표되었다.[14] 이어 1985년 5월 비준이 이루어졌고 1985년 6월 30일 전면 발효되었다.
영국령 홍콩 정부는 반환 문제가 해결된 1984년부터 1997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민주적 정치개혁을 해놓았다. 구의회를 주민 직선 선출로 바꾸고 국회 격인 입법국[15]에 일부 보통선거 선출 의석을 마련했다. 저런 개혁이 하나 하나 있을 때마다 중국은 공동선언 위반이라며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중영공동선언은 중국에 홍콩의 현행 체제를 유지할 것을 규정했는데, 중국은 '현행'의 의미를 선언 발효 시점인 1984년 혹은 그 이전으로 본 반면 영국은 반환 시점인 1997년으로 보았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즉 중국에게 현행체제 유지는 어차피 의미없는 것이라 중국은 '''일국양제를 지속하겠으며 어느 것도 더 좋은 게 없다'''며 큰소리를 칠 수 있는 것이었다. 물론 제1세계 국가들이나 홍콩 시민들이 생각하는 일국양제와 달리 중국이 생각하고 말하는 일국양제는 이웃 마카오처럼 '''중국화된 일국양제'''이다.
그리고 영중공동선언에 따라 1997년 7월 1일 자정에 영국이 홍콩을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하여 홍콩 특별행정구가 되면서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3. 군사


홍콩/군사 항목에서 주홍콩영국군 문단 참고.

4. 의의


영국홍콩 지배는 오늘날 세계 최고의 무역항 중 하나인 홍콩을 형성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자유항(自由港)이라는 이미지가 구축된 것도 영국 지배 시기 부터였다.
영국은 홍콩을 호주캐나다, 뉴질랜드, 싱가포르처럼 자기네 영토의 연장으로 건설했었고 그래서 극소수인 영국인뿐 아니라 중국인들이 잘 사는데도 치중했다. 물론 중일전쟁이 터지면서 광동에서 피난민이 내려와 구룡반도의 생활환경이 나빠지고 빈부격차는 넓어졌긴 했다만 홍콩 섬에 사는 오리지널 홍콩인들의 생활 수준은 원래부터 높은 편이었다. 구룡에서는 보기 힘들었던 롤스로이스가 홍콩 섬에서는 1905년부터 보이는가 하면 아시아에서 첫 번째 도시철도에 속하는 홍콩 트램도 섬쪽에서 이미 1904년 개업한다. 어쩌다가 홍콩을 거쳐 유럽이나 미국 등에 다녀온 일제강점기 당시 상류층들은 홍콩 섬의 부유한 생활상과 조선에서는 물론 일본에서도 구경하기 힘든 진귀한 유럽제 물건들이 일상품으로 쓰이는 풍경에 놀랐다.
그리고 영국의 식민지배 동안 선진적인 행정제도가 홍콩에 잘 안착되었고, 효과적인 공무원홍콩 경찰 등 치안유지 제도와 사회기반 시설, 높은 시민 의식, 친절한 공무원 및 공공 서비스 종사자들 등을 자랑한다. 영국은 비교적 민주적이고 청렴한 정부를 구축하여 중화인민공화국에 반환했기 때문에, 홍콩특별행정구 정부가 이를 승계하고 유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또한 식민지배를 받았음에도 영국에 대한 홍콩인들의 감정은 나쁘지 않다. 지금의 특별행정구 체제보다 비교적 더 좋아한다.[16] 젊은 세대는 매우 좋아하고. 일본군의 점령에서 벗어난 이후 취임한 21대 총독부터는 뭔가 하나쯤은 홍콩 사회에 긍정적인 업적을 남겨왔고, 비록 영국령 홍콩 정부는 완전한 민주주의 정치체제와 자치를 허락한 적은 없지만 그와는 별개로 67 구룡폭동 이후로는 주민들의 요구를 수용해 사회를 개선하려는 노력[17]을 해왔으며 언론자유도도 크게 상승했고 미진했던 민주화도 1980년대 이후로는 그럭저럭 이뤄놓고 떠났다.
역대 총독들은 부임할 때마다 스스로 광둥어식 이름을 짓는 전통이 있었다. 비록 홍콩에서 영어가 사회주류가 쓰는 언어이긴 했지만 나름대로 다른 방면으로는 식민지인과 가까워지려는 노력은 그래도 했던 모양이다. 그리고 홍콩 경찰의 백인 수뇌부 역시 광동어를 배워서 구사하고는 하며 현지화를 강조했다. 그리고 일본군이 홍콩을 점령하면서 그 당시 영국인 총독과 수뇌부를 감금하는 등 일본군으로부터 영국 총독부가 핍박을 받은 역사 때문에, 비록 총독과 식민지인 관계지만 일본군 점령 하에서 같이 고생한 사이라는 미묘한 감정도 있다. 이 때 호주로 후퇴한 홍콩 총독부는 계속 우표를 찍어냈는데 영국 왕실 사람들의 얼굴과 함께 영국인과 중국인이 힘 합쳐 항일투쟁을 할 것을 강조하는 내용들을 담았다.
홍콩이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반환되면서, 많은 중국 대륙 출신 중국인들이 홍콩으로 들어왔고, 이는 홍콩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이 시기 들어온 중국 대륙인 이민자들은 대부분 부패가 만연했고, 홍콩에서도 중국본토에서 했던 것과 동일하게 뇌물을 주고 받았다. 주로 민간 영역에서 문제가 빈발하며 염정공서가 단속을 강화하고 있다. 또한 중국 공산당은 겉으로는 일국양제를 고수하겠다고 말하고 있지만, 내심 공산당은 홍콩의 민주주의적 자치에 불쾌해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이 말하는 일국양제는 정치적인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며, 국가보안법, 애국주의 교육 등을 실시하는게 그 골자이다. 홍콩의 경우 저 둘이 강력한 반발로 실시되지 못했으나 마카오는 실시 중이다.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구역이고 어쨌든 홍콩 행정부와 사법부는 홍콩인들이 스스로 구성하는 만큼 굳이 민주주의까진 필요 없고 어느정도 중국화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게 중국 공산당의 일관된 입장이며 서방이나 홍콩 민주파의 민주화 요구를 징징거림으로 일축하며 '''일국양제를 지속할 것이며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고 늘 강조한다.
때문에 홍콩인들과 중국 대륙 출신 중국인들은 서로에 대해 상당한 불만이 쌓여있고 이것이 2014년 홍콩 민주화 운동2019년 홍콩 민주화 운동이 벌어지는 이유가 되었다.
그리고 중국 본토로부터 독립해야 한다고 공공연하게 주장하는 홍콩인들도 있다. 이들은 기존 민주파와 다르게 독립파로 불리며 극소수이지만 젊은 세대에게는 크게 어필 중이다. 더 자세한 것은 홍콩 독립운동 문서를 참조할 것.

5. 참고 문서




[1] 현 홍콩행정특별구에서 구룡채성의 면적을 뺀 넓이.[2] 홍콩 섬의 항구로 현재는 항구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다. 현재는 센트럴애드미럴티 일대를 일컫는 말로 의미가 바뀌었다.[3] 참고로 영국령 홍콩은 1982년 이전까지는 영국 본토에서 파견한 총독이 입법, 사법, 행정을 모두 쥐고 지배하는 체제였지 홍콩 주민이 정치에 참여하는 민주주의 체제가 아니었다. 그래서 근래에 영국이 홍콩 문제에 개입할 때 중국은 이를 들어 비판한다. 하지만 2차대전 직후 마크 애이치슨 영 총독이 구상한 이른바 '영 플랜 (시의회를 설치하여 3분의 2를 주민 직선으로 선출하고, 행정조직 내에 중국계 홍콩인의 비중을 늘리는 방안이다.)을 도입하려 하자 중국은 홍콩을 해방시키겠다며 영국을 협박했고, 마지막 총독 크리스토퍼 프랜시스 패튼이 실시한 민주적 개혁을 백지화한 걸 보면 내로남불이나 다름없다.[4] King(남성)/Queen(여성). 주로 왕 또는 여왕으로 번역한다. 단, 영국 국왕은 인도 제국에 한하여 황제(Emperor/Empress)의 자격을 인정받았다.[5] 광동어 발음으로는 '잉쏙형꽁', 표준중국어 발음은 '잉수샹강'[6] 아편은 당시 최대 식민지인 인도 제국, 정확히는 파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일대에서 재배한 것이었다.[7] 빅토리아 여왕의 도시라는 뜻으로 당시 여왕이 빅토리아였다.[8] 자유무역항 기능은 훗날 싱가포르가 독립하자 여기 넘겨준 지 오래고 싱가포르도 두바이, 도하아라비아 반도에 차츰 넘겨주고 있다. 중국으로의 관문만은 그 누구도 대체불가라 현재도 잘 활용중이며 오히려 중국의 급성장으로 더 역할이 중요해지고 있는 중이다.[9] 이들은 1980년 중국의 개방 이후 인건비가 비싸지고 금융업이 홍콩 산업으로 떠올라 중국으로 건너가고 현재는 가내 수공업 수준으로 잔존한다.[10] 돈이 없으면 물도 없다며 소위 물세를 걷었다. 구조대는 중장비 작업비를 받고 구급대는 유류비를 받았다.[11] 1980년대 항만 시설을 구룡반도 북서부 콰이충으로 옮기기 전까지 빅토리아항이 주요 항만 역할을 했다. 현재 마카오로 가는 페리가 드나드는 슌탁센터도 이 빅토리아항에 있다.[12] 그땐 쿤통에서 침사추이, 몽콕을 거쳐 센트럴로 연결되는 식이었다.[13] 1971년부터 1982년까지 재임한 25대 총독 머레이 맥클레호스의 업적으로 역대 총독 가운데 홍콩의 발전을 가장 크게 이루어냈다는 평가를 받는 사람이다. 이 사람의 이름을 딴 트래킹 코스도 있을 정도로 홍콩인의 평가가 좋다. 다만 재임시절 영국에서는 비난을 받았는데 홍콩의 사회적 인프라를 짓느라 영국의 예산을 엄청 땡겨다 써서 중국에 돌려줄 식민지에 예산을 퍼준다고 여야의 비난을 받았다.(...)[14] 기본합의서 조인은 1984년 10월에 리처드 에반스 주중 영국대사와 저우난 중국 외교부 부장 사이에서 이루어졌다.[15] 현재의 홍콩 입법회. 입법국은 반환 직후 '''중국 정부가 강제로 해체했다.'''[16] 차별 및 소통에서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17] 빈부격차 해소, 영국인과 중국인의 차별 해소, 부패 척결 등등